공화정으로 체제를 변화시켰다.
이탈리아를 정복한 작은 마을
BC 753년 로물루스가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를 세웠을 때, 어느 누구도 팔라티누스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작은 마을의 운명을 예견하지 못했다. 티베르강 오른편을 경계로 해서 자
리잡은 에트루리아는 거듭 이동하여 점차 중앙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떨친다. 남쪽 이스키아
에는 최초의 그리스 출신 식민지 주민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도시의 융성이라는 역사적인 흐름을 타는 행운을 안고 있었다. BC 6세기 말
엽에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세력권 내에서 로마는 강대하고 번창한 도시국가로 떠오른다. 전
통에 따라 왕이 통치해 오던 로마는 BC 509년 정치 수반
은 집정관들로, 해마다 시민들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법이 로마
를 지배했으며, 이는 훗날 시민법의 주요한 원칙을 이룬다(이 법은 광장 한 편에 붙은 동
판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12표법`이라 불린다). 이 시기를 공화정 시기라고 부른다(BC
509-527). 날로 강성해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의력 때문에 에트루리아는 중앙 이탈리아
에서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때가 BC 474년으로 이후 BC 3세기까지 공화정 체제의 로마는
자유로이 성장하면서 에트루리아 도시동맹 세력을 흡수하고자 노력한다. 로마는 세력이 약
해진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분쟁을 일으켰으며, 라티움의 라틴족, 아브루치의 삼니음인들과
같은 중앙 이탈리아의 여러 민족들, 그리고 더 남쪽으로는 마그나 그레키아의 도시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2세기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 도시연방을 거느리
게 된다. 이 거대한 연방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있는 여러 도시들뿐만 아니라 정복활동으
로 건설한 수많은 식민지도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들의 충성도는 대단해서(식민지들은 로마
를 모델로 도시국가를 건설햇고 로마의 시민들이 이주하여 살았다). 로마는 그 위세로 이탈
리아 동맹국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동맹세력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
포에니 전쟁의 시련
로마가 지중해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로마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의 영토확장 욕구와 이해관계는 몇 가지
조약을 맺는다고 해결될 성싶지 않았다.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한 세기 동안 세 번의
전쟁을 치른다. 첫 번째 전쟁의 서곡은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된다(BC
264-241). 이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명백하게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었다.
곧 두 번째 전쟁이 벌어졌다. 서부 지중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 처절한 대규모
전쟁은 카르타고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패전으로 끝을 맺는다(BC 219-202). 군대와
코끼리를 앞세워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 한니발은 여러 도시와 시민들이 로마를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로마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여러 도시들이 그의 대열에 합류했고 그는
눈부신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엄청난 수의 병사를 공급해 주었던,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군사동맹의 견고한 고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밀려난 한니발은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퇴하고 만다(BC 202). 로마의 최대 적
수였던 카르타고는 잔류세력들의 마지막 저항에도 불구하고 BC 146년 마침내 멸망한다.
세계정복
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 중심의 동맹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로마는 세 차례
의 전쟁을 통해 BC 3세기말부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 세운 제국들, 특히 마케도니아에 대항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그리스의 도시들이 로마에 도움을 요청, 로마를 지중해 동부지역에 rm끌어들였다. 그
러나 로마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제국과
도시들까지도 무릎을 꿇게 만든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과 전쟁은 1세
기 중반까지 계속됐으나, 로마의 지배력은 확고부동했다. 로마는 끝없이 확장정책을 펼쳤
으며 BC 30년경에는 이집트까지 굴복시킨다.
그러는 동안 로마와 전 이탈리아는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격량에 휩싸인다.